필리버스터

어떤 민주주의를 기록하다

국회 본회의장

ⓒ시사IN 신선영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보기 위해 국회 방청석으로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사진은 필리버스터 나흘째인 2월26일 국회 본회의장 풍경.

필리버스터 이후의 민주주의는 다르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192시간. 2월23일부터 3월2일까지 9일에 걸쳐 진행된 테러방지법 의사진행 방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세계 최장 기록을 세웠다. 쟁점이 된 테러방지법은 필리버스터 종료 직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결국 통과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원하던 법을 얻어갔다. 이 때문에 필리버스터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고 믿고픈 이들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민주주의는 말을 먹고 자란다. 독재에서 민주화로의 도정이 때로 피를 동반한다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총칼 대신 말로 싸운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발전할 수 있다. 192시간 필리버스터는 우리 세대가 지켜본 가장 끈질긴, 그 어떤 물리력도 동반하지 않은 말의 투쟁이었다. 정치학계의 석학 아담 셰보르스키는 “민주주의란 우리가 서로 죽이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체제다”라고 했다. 말은 경쟁자를 직접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무기다.

한국 정치는 192시간 필리버스터를 만나 가장 순정에 가까운 말의 투쟁이라는 중요한 샘플을 갖게 되었다. 이후로 의회 전략을 짜는 원내정당은 좋든 싫든 이순정 샘플을 선례로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가 물리적 충돌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세계는 192시간 필리버스터가 없던 시절과는 다른 풍경일 것이다.

헌정사에 기록될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 주요 언론 다수가 침묵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의원이 담담하게 풀어내는 가족 수난사도, 정보위 야당 간사 신경민 의원이 툭툭 풀어놓는 국가정보원 비화도, 평소라면 언론을 달구기 충분했을 ‘이야기 되는’ 발언들이 주목받지 못하고 흘러갔다. 몇몇 언론은 필리버스터가 시간 깨기 경쟁에만 관심이 있다고 비난했다. 사실 시간 경쟁에만 관심을 가진 건 언론이었다. 온라인 세계가 필리버스터 의원들의 삶과 콘텐츠에 주목하는 동안 대다수 언론은 경마 보도를 쏟아냈다.

언론은 기록을 먹고 자란다. 말은 기록이 있어야 완성되는 무기다. <시사IN>은 9일 동안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필리버스터의 주요 장면을 지면과 SNS 계정을 통해 끈질기게 기록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다. 누가 몇 시간을 돌파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정치인이 어떤 사실과 관점을 동원하여 시민의 기본권을 주장했는지, 그가 들려주고픈 핵심을 최대한 포착하려 노력했다. 공식 기록인 국회 속기록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의원은 국회 속기록에 자신의 말을 남기기 위해 분투한다. 오늘 힘이 모자라 막아내지 못하더라도 반대의 기록이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기대가 이들을 떠받친다.

192시간 필리버스터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테러방지법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놀라운 192시간 이전으로 돌아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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